#1 태평양전쟁기 총궐기하여 독립을 쟁취하자

고학생 민족운동의 밑거름이 된 오동휘

글. 자료발굴TF팀 그림. 류주영
  • 1923년 경남 동래 구포에서 출생한 오동휘는 1935년 3월에 구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11월 상급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년이 채 안 되었던 시기라 조선이든일본이든 분위기는 긴장감이 돌았다.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굵직한 독립운동가들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대부분 예비검속으로 체포, 구금되었다.

  • 오동휘는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상점에서 점원으로 일하다가 1939년 4월 도쿄(東京) 오모리구(大森區)에 있는 신문보급소에 들어갔다.신문배달을 하며 숙식을 해결하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42년 7월에는 오사카(大阪)로 옮겨 시멘트 공사인부로 일하고 다시 도쿄에서 상급학교 수험 준비를 하며 힘겨운 생활을 이어갔다.

  • 3~4년간 진학을 위해 여러 노동일을 전전하는 동안 오동휘는 재일조선인의 실상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조선인은 상급학교 입학이 어려웠고 취직은 쉽지 않았으며,일제가 내건 내선일체는 허울뿐이었다. 조선민족이 압박과 차별대우에서 벗어나려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길 밖에는 없었다.

  • 일본에서 독립운동은 1930년 전후 왕성하게 일어났지만 1933년과 1934년 대검거로 완전히 전멸되다시피 했다.
    침잠해 있던 민족운동은 중일전쟁 이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전쟁이 길어지면서 전황이 악화되고 이 기회에 일제히 봉기하면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났다.
    오동휘 역시 이러한 정세 판단하에 도쿄를 무대로 같은 뜻을 가진동지를 결집하기 시작했다.

  • 오동휘는 도쿄 신문보급소에서 함께 동고동락하던 황해도 출신 박인권과 의기투합하여 민족문제를 연구하고일제가 패전할 때 총궐기하여 독립을 쟁취하자는 결의를 다졌다. 오동휘의 감화를 받은 박인권은 귀향하여 황해도 황주에서박근석, 이의섭을 동지로 획득했다.
    이들은 민중을 계몽시키고 민족의식을 높여 결정적 시기에독립전선에 합류하고자 했다.

  • 태평양전쟁을 부정적으로 논하고 독립국가 건설을 모색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오동휘와 박인권은 징역 2년, 나머지 두 사람은 1~2년을 받아 수감되었다. 오동휘는 가혹한 수형생활 중 1944년 1월 5일 해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오동휘의 활동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개인이 각자의 위치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할지를 보여주었다.
    정부는 오동휘의 활동을 기려 202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