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를 향한 이들의 처절한 여정과
외침은 비록 강대국들의 냉혹한 이해관계에 가로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국권 회복을 향한 대한제국의 단호한 의지를 전 세계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만국평화회의 파견의 배경부터 헤이그에서의 외교전,
그리고 이준 열사의 순국과 고종의 강제 퇴위로 이어진 비극적 역사 현장을 살펴본다.

을사늑약 이후 고종의 외교적 고립과 비밀외교의 시도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이 경운궁을 포위한 가운데 고종이 거처하고 있던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가 대한제국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에 직접 서명하지 않았고, 조약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일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통감부를 설치하고는 외교권을 빼앗아 가버렸다. 나라의 주권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중에 고종이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고종은 주권자로서 유럽 주재 공사들에게 훈령을 보내, 수교국 정부에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무효를 알리도록 지시했다.
영국『 트리뷴』 기자 더글러스 스토리를 통해 열강에 보낼 국서를 전달하여, 일제의 강압을 고발하면서 열강에 의한 일정 기간의 공동 보호를 요청했다. 1906년 6월에는 헐버트에게 밀지를 내려 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벨기에·중국 등 여러 국가의 원수에게 협조를 요구토록 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 친서들은 각국 원수에게 제대로 전달되지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1906년 여름 개최될 예정이었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마저 열강들의 일정과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대한제국은 애초 러시아로부터 정식 초청 대상국에 포함되어 있었고, 고종은 이를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좋은 기회로 여겼기에 측근 이용익·이상설을 특사로 내세워 러시아의 협조를 구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참가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회의 개최가 1년 가까이 미뤄지는 동안 국제 정세는 대한제국에 더욱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 사이 고종에게는 황제라는 지위만 남아 있을 뿐, 황제가 행사해야 할 주권은 하나둘 그의 손을 떠나고 있었다. 통감부와 일본 측의 감시는 갈수록 심해졌고, 궁궐 안팎의 행동과 외부 인사와의 접촉마저 제약받았다. 더구나 의지했던 열강까지 하나둘 등을 돌렸다. 공식적인 외교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고종에게 남은 것은 밀서와 비밀 특사, 그리고 국제사회에 대한 호소뿐이었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 위임장
고종의 마지막 특사, 이상설 · 이준 · 이위종 파견
1907년 6월,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이 먼저 움직였다.
전덕기·이회영·이준 등은 이 회의를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호소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특사 파견을 추진했다. 고종 역시 이에 뜻을 같이하면서 헤이그 특사 파견은 비밀리에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정사에 이상설, 부사에 이준과 이위종이 임명되었다.
당시 이상설은 북간도 용정에 머물고 있었고, 이위종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 이에 국내에 있던 이준이 고종으로부터 전권위임장과 각종 문서를 받아 먼저 길을 떠났다. 고종의 위임장에는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이며, 일본이 1905년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강탈했으므로 특사들이 헤이그에서 대한제국의 처지를 알리고 외교권 회복을 도모하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준은 1907년 4월 22일경 서울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경부선을 타고 부산으로 내려간 뒤, 부산항에서 기선에 올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5월 9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이준은 북간도에 있던 이상설에게 급전을 보냈다.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해 민족교육운동을 벌이고 있던 이상설은 5월 14일경 이준의 전보를 받고 이동녕·정순만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곳에서 합류한 두 사람은 연해주 한인사회의 도움을 받아 여비를 마련하는 한편, 앞으로의 외교활동에 필요한 준비를 갖추었다. 이후 이상설과 이준은 1907년 5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랐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무역사무관은 이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 한다는 정보를 본국에 보고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이들의 움직임을 즉각적인 위협으로 판단하지 않아 이상설과 이준은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은 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이 내세운
‘동양의 평화’가 허구이며
한국인들이 일본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싸울 것임을 역설했다.
『평화회의보』 (1907. 7. 5.)
만국평화회의 입장을 거부당한 특사들
1907년 6월 4일, 이상설과 이준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9,300여㎞를 달린 끝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전 주러시아공사 이범진과 접촉했고, 그의 아들 이위종이 합류하면서 이상설·이준·이위종으로 이루어진 헤이그 특사단이 비로소 완전체를 이루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서 생활한 이위종은 러시아어에 능통했고 프랑스어와 영어도 구사할 수 있어, 이후 특사단의 대외교섭과 언론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특사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얻는 일이었다. 고종이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낸 친서를 전달하고 러시아의 협조를 얻기 위해 약 보름 동안 교섭하였으나, 러시아 정부의 태도는 냉담했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하고 있던 러시아는 한국 문제로 일본과 다시 충돌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특사들은 니콜라이 2세를 만나지 못했고, 고종의 친서도 직접 전달하지 못했다. 오히려 러시아 외상 이즈볼스키는 헤이그에 있던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에게 한국 특사단에 협조하지 말라는 전문까지 보냈다.
고종의 친서에는 대한제국이 본래 자주독립국이며, 일본이 1905년 을사늑약을 강요하여 외교권을 불법적으로 빼앗았으므로, 특사들이 만국평화회의에서 일본의 불법행위를 각국 대표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러시아가 도와 달라는 요청이 담겨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국제사회의 공론을 일으켜 대한제국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의 냉담한 태도에도 특사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헤이그에서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할 장서(長書)와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고 외교전을 준비했다.
그 중심에는 장서(長書)와 공고사(控告詞)가 있었다. 이들 문서에는 일본이 무력과 강압을 통해 을사늑약을 강요하였으며 고종이 이를 승인하지 않았으므로 조약은 무효이고, 대한제국은 여전히 주권을 지닌 독립국이라는 논리를 국제사회에 제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사들은 6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났다. 도중에 독일 베를린에 들러 필요한 문서를 인쇄·정비한 뒤, 6월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6월 15일에 개막한 지 이미 열흘이 지난 뒤였다.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들은 숙소 호텔 옥상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곧바로 회의 참가를 위한 교섭에 나섰다. 먼저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를 찾아가 대한제국 대표단의 회의 참가를 요청하였지만 거절됐다. 이어 네덜란드 외무대신에게 면담과 회의 참가를 요청했지만 이 또한 거부됐다. 일본 측은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했으므로 독자적인 대표를 파견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고, 열강 역시 이를 뒤집으려 하지 않았다.공식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자 특사들은 전략을 바꾸었다, 6월 27일 공고사를 담은 1책을 프랑스와 영어로 작성하여 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 외신 기자들에게 전달했다. 이렇듯 대한제국 특사들이 애쓰는 모습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던 각국 기자들이 움직였다. 6월 30일 자 회의 전문 신문『 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에 ‘무슨 이유로 한국을 제외하였는가’라는 논설이 실리는가 하면, 영국 언론인으로 국제협회 의장 윌리암 스테드의 후원으로 7월 5일 자에 장서(長書) 전문이 게재되었다.
절정은 7월 9일이었다. 특사들이 기자단의 국제협회에 초청되었고, 이위종은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주제로 열변을 토했다. 그는 일본이 내세운 ‘동양의 평화’가 허구이며 한국인들이 일본의 지배에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싸울 것임을 역설했다. 그의 연설은 참석한 언론인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국제협회는 한국의 처지에 동정을 표하는 결의안을 박수로 채택하였다. 이 내용은 헤이그 현지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그러나 언론의 동정이 열강의 정책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각국 대표들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걸고 대한제국을 위해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헤이그 특사의 활동은 국제여론을 환기하는 데에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지배하던 당시 국제질서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헤이그에서 이준의 순국과 일제의 고종 강제 폐위
특사들은 일제의 방해와 각국의 냉대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때 이준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끊기에 이르렀고, 결국 7월 14일 순국하고 말았다. 이준은 뺨에 종기를 앓긴 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사인은 아니었다.
이준의 죽음은 곧 국내에도 알려졌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등은 그의 죽음을 자결 순국으로 보도했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오랫동안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상설은 7월 17일 이준의 유해를 헤이그 교외 공동묘지에 임시로 안장하였다.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구미 각국에서 외교활동을 이어간 뒤 다시 헤이그로 돌아와 9월 6일에 묘지를 영구 임대하여 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그의 유해는 1963년 국내로 봉환되어 서울 수유리 묘역에 안장되었다.
한편,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고종을 제거할 절호의 구실로 삼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특사 파견이 을사늑약을 위반한 행위라며 책임을 추궁했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내각도 고종의 양위를 압박했다. 결국 고종은 7월 19일 황태자에게 ‘군국대사’를 대리하도록 명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사실상의 양위로 간주하고, 이튿날인 7월 20일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양위식을 강행했다.
고종의 퇴위는 자발적인 선택이라기보다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가한 강압의 결과였다. 대한제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세계를 향해 마지막으로 문을 두드렸던 비밀외교는 끝내 국권 회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헤이그에 울려 퍼진 세 특사의 외침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지배를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며, 끝까지 자신의 주권과 독립을 주장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와 후대에 분명히 남겼다.
이준 열사가 순국한 드용 호텔

국외사적지

네덜란드 헤이그 이준열사기념관(Yi Jun Peace Museum)
위치: 네덜란드 헤이그 바겐스트라트(Wagenstraat) 124,
헤이그 특사가 머물렀던 옛 드용(De Jong) 호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은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고, 일제의 불법적인 행위를 고발하였다. 그러나 외교권이 박탈된 상황에서 외교활동이 어렵게 되며 이준 열사는 이곳에서 7월 14일 순국하였다. 1995년 8월 5일, 이준열사기념관(Yi Jun Peace Museum)이 개관하여 한국특사의 활동을 전시하고 있다. 이 건물은 시내 중심부에 있는 조용하고 한적한 거리이며 건물의 전면 출입구에는 ‘이준열사기념관’ 간판과 함께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본문 내용은 필자의 의견으로 독립기념관의 공식적인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